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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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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실미도(영화)는 1968년 북한의 김일성 암살을 목표로 창설된 684부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1971년 작전 중단 후 부대원들의 반란과 비극적인 결말을 그린다. 영화는 1,0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고, 실미도 사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영화 내용의 사실 왜곡에 대한 비판과 논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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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영화) - [영화]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실미도 영화 포스터
영화 포스터
원제실미도
로마자 표기Silmido
감독강우석
제작Jonathan Kim, 이종선, 시네마 서비스
각본김희재
출연설경구, 안성기, 허준호, 정재영, 강성진, 강신일, 임원희, 이정헌, 엄태웅, 김강우
음악조영욱, 한재권
촬영김성복
편집고임표
배급사시네마 서비스, 동영 (일본)
개봉일2003년 12월 24일 (대한민국), 2004년 6월 5일 (일본)
상영 시간135분
제작 국가대한민국
언어한국어
제작비850만 미국 달러
흥행 수입6억 엔 (일본)
대한민국 관객수11,081,000명 (2013년 12월 기준)
외부 링크
공식 웹사이트조선일보 기사

2. 영화의 배경 및 역사적 사건

영화는 1·21 사건을 계기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지시로 684 부대가 설립되어, 혹독한 훈련을 거쳐 전투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북 침투가 지연되다가 결국 실미도 사건을 일으키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실미도의 위치를 보여주는 인천 해안 지역 지도.


영화 개봉 후, 684부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졌고, 대한민국 국방부는 2006년에 이 부대와 봉기에 대한 공식 보고서를 발표하여 처음으로 그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5] 보고서에 따르면, 684부대는 대한민국 공군 소속이었으며, 31명의 훈련병 중 7명이 훈련 중 사망, 20명이 봉기 과정에서 사망, 4명이 군사 재판 후 처형되었다.[6]

1971년 8월 23일 발생한 봉기의 원인은 불분명하다. 영화에서는 정부가 훈련병들의 기밀 누설을 우려해 처형을 결정하고, 이에 훈련병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묘사된다. 영화 제작자 조나단 김은 이 부분의 역사가 불분명함을 인정한다.[6]

실미도 봉기에서 살아남은 6명의 경비병 중 한 명인 양동수는 부대의 임무가 북한 침투 및 김일성 암살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영화에서 31명의 훈련병들을 사형수로 묘사했지만, 대부분은 사소한 범죄자들이었다고 말했다. 양동수는 훈련병들이 북한에 갈 기회를 얻지 못하고 섬을 떠나지도 못할 것이라는 절망감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진술했다.[6]

2010년 5월 19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정부에 684부대 21명의 유족에게 2.73억을 배상하라고 명령했다. 법원은 훈련 위험 미고지, 가혹한 훈련으로 인한 인권 침해, 유족에게 사망 사실 미통보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인정했다.[5]

영화에서는 탈취한 버스 운전수가 총격전에서 부상당했지만, 실제로는 도망쳤다. 버스 안에서 '적기가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실제로는 없었다.

2. 1. 1·21 사태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

1·21 사태19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 부대 소속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여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던 사건이다.[11] 이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박정희 정권은 김일성 암살 및 저택 폭파 계획을 세우고 684부대를 창설했다.[11]

2. 2. 684부대 창설

1968년 1월, 북한 공작원에 의한 대한민국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북한 김일성 암살 계획이 수립되었고, 이 계획을 실행할 극비 특수 부대 "684부대"가 실미도에서 창설되었다.[11]

684부대는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을 받은 KCIA 부장 김형욱의 지시에 따라 창설되었으며, 실제 관리 운영은 공군이 담당했다. 정식 부대명은 '''공군 2325전대 209파견대'''이며, "684부대"라는 명칭은 부대가 창설된 1968년 4월에서 유래되었다.

31명으로 편성된 부대원들은 인천 앞바다의 실미도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으나, 훈련 중 사고로 7명이 사망했다.[11] 영화에서는 중범죄자나 사형수가 특사와 맞바꿔 부대원으로 동원된 것처럼 묘사되었지만, 실제로는 고액의 보수에 매료되어 응모한 '''일반인'''이 대다수였다.[10][12] 또한, 정부는 권유 당시의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13]

2. 3. 실미도 사건

1968년 1·21 사태를 계기로 북한 김일성 암살을 위해 극비 특수 부대 "684 부대"가 실미도에서 결성되었다.[11] 정식 부대명은 '''공군 2325전대 209파견대'''이며, "684부대"라는 명칭은 부대가 창설된 1968년 4월에서 유래되었다. 부대 창설은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을 받은 KCIA 부장(당시) 김형욱의 지시에 따른 것이며, 실제 관리 운영은 공군이 담당했다.

31명으로 편성된 부대는 인천 앞바다의 실미도에서 훈련을 받았으나, 훈련 중 사고로 7명이 사망했다.[11] 남북 공동 성명 이후 남북 화해 (햇볕 정책)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암살 계획은 1971년에 철회되었지만, 기밀 유지를 위해 대원들은 실미도에 고립되었다. 목적을 잃은 훈련은 계속되었고, 대원들의 불만은 커져갔다.

1971년 8월 23일, 24명의 대원들은 반란을 일으켜 교육대원을 살상하고 실미도를 탈출했다.[11] 이들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열악한 처우 개선을 호소하고자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했지만, 대한민국 국군과의 총격전 끝에 수류탄으로 자폭했다. 20명이 사망하고, 생존자 4명은 군사 재판 후 1972년에 총살되었다.[11]

영화에서는 중범죄자나 사형수가 특사와 맞바꿔 부대원이 된 것처럼 묘사되었지만, 실제로는 고액의 보수에 매료된 '''일반인'''이 대다수였다.[10][12] 또한 정부는 약속했던 보수를 지급할 생각이 없었다.[13]

3. 영화 줄거리

1968년 1월 21일, 124군 부대 소속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 미수 작전을 위해 남한에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대한민국 국군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사형수와 무기징역수를 포함한 범죄자 등 사회 부적응자 31명으로 684부대를 창설한다.

684부대원들은 실미도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던 중, 두 명이 막사에서 탈출하여 여성 의사를 강간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들은 곧 발각되어 처형될 것을 예상하고 자살을 시도,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죽였지만 자살하기 전에 체포된다. 체포된 군인은 다시 부대로 돌아와 묶인 채 다른 684부대원들이 경비병에게 구타당하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 격분한 684부대원 중 한 명이 경비병의 몽둥이를 빼앗아 묶인 군인을 죽인다.

국가안전기획부는 김일성 암살 계획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684부대원 전원을 살해하기로 결정한다. 부대 지휘관은 항의했지만,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684부대와 함께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의무와 명예 사이에서 갈등하다 정보를 684부대원에게 유출한다. 그날 밤 살해당할 것을 깨달은 부대는 반란을 계획한다.

이 사건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지만, 보고서는 읽히지 않고 창고에 보관된다.

3. 1. 혹독한 훈련 과정

1968년 청와대 습격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대한민국 국군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사형수와 무기징역수를 포함한 범죄자 등 사회 부적응자 31명으로 684부대를 창설한다. 훈련병들은 실미도로 이송되어 훈련을 받는다. 이들에게 훈련은 자신을 구원하고 조국에 대한 충성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제시되었으며, 성공하면 자유와 새로운 삶을 얻게 된다는 목표를 가지고 훈련을 견뎌냈다.

훈련병들은 몇 달에 걸쳐 낙인 찍기를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극심한 훈련과 규칙적인 신체적 처벌을 견뎌냈다. 훈련병 중 한 명은 로프 코스에서 떨어져 사망하기도 했다.

3. 2. 작전 중단과 좌절

1971년,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김일성 암살 작전은 중단되었다. 684부대는 북한으로 파견될 예정이었으나, 출발 직후 소환되었다.[1] 정부가 북한과의 평화적 화해를 시도하면서 계획이 취소된 것이었다.[1] 이에 훈련병들은 실망과 좌절감에 휩싸여 실미도로 돌아왔다.[1]

3. 3. 봉기와 진압

1971년 8월 23일, 684부대원들은 처형될 위기에 놓였다는 것을 인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경비병 대부분을 사살하고 실미도를 탈출, 대한민국 본토로 향했다.

684부대원들은 자신들의 존재와 억울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민간 버스를 탈취하여 서울로 향하던 중, 라디오를 통해 자신들이 "무장 공산주의자"로 발표되고 비상사태가 선포된 것을 알게 되었다.

육군 검문소를 통과하며 총격전을 벌인 끝에, 동작구 유한양행 건물 앞에서 군경에 포위되었다. 격렬한 총격전에서 한국군은 버스 안의 민간인 안전을 무시했다.

결국 684부대원 대부분이 죽거나 다쳤고, 많은 한국 군인도 사망했다. 살아남은 부대원들은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민간인 인질을 풀어주고 수류탄으로 자폭했다.

4. 등장인물

(대한민국 공군 준위・684부대 훈련대대장)안성기츠카야마 마사네니시다 켄강인찬
(684부대 3반장)설경구테라소마 마사키타카가와 유야조2등병
(대한민국 공군 병)허준호나카무라 히데토시타니 마사키한상필
(684부대 1반장)정재영야마지 카즈히로세키 타카아키원희
(684부대 1반원)임원희타카기 와타루오야 히토시조근재
(684부대 2반장)강신일츠지 신파치이와사키 히로시박2등병
(대한민국 공군 병)이정헌사키노 슌스케미야우치 아츠시장석
(684부대 취사병)강성진후지와라 케이지이가라시 아키원산
(684부대 대원)엄태웅이토 켄타로단 토모유키기타카와시마 토쿠요시
토리하타 히로토
이토 카즈아키
모로즈미 켄이치
호리베 류이치타나카 아키오
오가와 타케오
사토 유시
사사키 사토시
우치노 노리유키
사토 준
와타나베 조
마츠야마 타카시
히메노 케이지
이마루오카 아츠시
아카마 코이치
히라 카츠이
이타쿠라 미츠타카
우츠기 쿄헤이
오쿠다 타카히토
치치가와 류사쿠
세키구치 아츠시
키리야마 유미
키타니시 준코colspan="4" |연출야스에 마코토키무라 에리코번역서하세츠조정쿠로사키 유키카나야 카즈미효과사운드 박스제작글로비전토호쿠 신샤첫 방송2005년 6월 5일
『일요 양화 극장』
(21:00-23:09)


4. 1. 684부대원

배역배우
강인찬 (684부대 제3조장)설경구
한상필 (684부대 1조장)정재영
원희임원희
박찬석강성진
조근재 (684부대 2조장)강신일
원상엄태웅
민호김강우
재용이상홍
장수김홍택
준호노준호
대윤장대윤
익준최영
정훈전정훈
경수변경수
창식정경조
기환김기환
양원육양원
수영최수영
주봉정용호
학현이학현
종훈마종훈
덕양김기성
동훈이동훈
지환조지환
영옥신영옥
효석윤효석
지용김봉식
정국김태수
재승류제승
경훈김경훈
도한강도한
정훈이종문
상민원웅재
재석이경근
해일김형종
동진정기성
정섭조재와
순갑박순갑
동준이동준
관호엄관호
진수박진수
전혁최진
태신김태신
현준김현준
성호신성호
중대권중대
정운심정문
명규최영규
진휘김진휘
재승석재승
민호김민호
경호양경호
성기백성기
대현유대현


4. 2. 대한민국 공군 관계자

(대한민국 공군 병)허준호박2등병
(대한민국 공군 병)이정헌


4. 3. 기타 인물

배역배우
중앙정보부장 이병호이승철
오 국장이효정
김 장군송용태
북한 124군 부대 김신조신덕호
판사최연식
인찬 모박승태
김 회장이석구
실미도 근처 분교 여선생정지연
북한 124군 부대원전상진, 현철호, 장유상
프롤로그 형사방길승
프롤로그 기자김훈호
프롤로그 약혼남신우철
프롤로그 약혼녀민영
중앙정보부 기관원이성원
대방동 대대장강승원
대방동 작전장교서진원
대방동 통신장교박상혁
창고 공무원주경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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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안 아줌마최민금
버스 안 여고생정유미
버스 안 아이손소진
버스 안 기사유상섭
버스 안 남학생김원석
버스 안 여학생김문희


5. 제작 과정

강우석 감독이 연출하고 김희재 작가가 각본을 쓴 영화 실미도는 백동호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2] 이민호 프로듀서를 비롯하여, 촬영에 김성복, 조명에 신학성, 음악에 조영욱과 한재권, 특수효과에 정도안과 이희경, 무술에 정두홍과 유상섭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제작 과정에 참여했다.[2]

주요 제작진은 다음과 같다.[2]

역할담당자
감독강우석
조감독심혁, 강지은, 백상열
각본김희재
원작백동호
촬영김성복
조명신학성
음악조영욱, 한재권
특수효과정도안, 이희경 (데몰리션)
무술감독정두홍, 유상섭


5. 1. 촬영

촬영은 주로 대한민국에서 이루어졌으며, 수중 장면과 겨울 훈련 장면은 각각 몰타뉴질랜드에서 촬영되었다.[2]

6. 영화에 대한 평가 및 반응

''실미도''는 대한민국에서 1,0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최초의 영화로 기록되었으며, 버라이어티 등 언론의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했다.



대한민국 영화대상에서는 정재영허준호가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은 하지 못했다.

영화의 흥행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1월 실미도 사건의 진상 규명을 결정했으며[10], "영화가 국가를 움직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6. 1. 흥행 성공

실미도한국어는 1·21 사건을 계기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보복하기 위해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지시로 설립된 684 부대의 창설부터 실미도 사건까지의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110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여 대한민국 영화 사상 최초로 10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되었다.[2]

이 작품을 통해 오랫동안 잊혀졌던 실미도 사건이 재조명되었고, 실미도 부대와 같은 북파부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영화의 흥행 성공으로 실미도는 관광지로 개발되기도 했다.

실미도한국어는 개봉 26일 만에 600만 명 이상이 관람했으며, 대한민국에서만 3000만달러가 넘는 수익을 올렸다.[2] 일본에서는 4540528USD, 미국에서는 제한적인 개봉을 통해 298347USD의 수익을 올렸다.[3]

실미도한국어는 대한민국에서 1,0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최초의 영화였으며, 1,174만 명의 관람객을 기록한 2004년 태극기 휘날리며한국어가 개봉하기 전까지 역대 최다 관람 영화 기록을 보유했다.

버라이어티의 데릭 엘리는 이 영화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며 제작과 캐스팅을 모두 칭찬했다.[2]

영화 제작을 방해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영화의 반향을 본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1월에 사건의 진상 규명을 결정했다.[10] 한국에서는 "영화가 국가를 움직였다"며 다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6. 2. 수상 경력

연도부문수상자(작)
2004년제12회 춘사영화대상심사위원특별상강우석
제27회 황금촬영상촬영상 동상(수상자 정보 없음)
대종상각색상김희재
기획상김동원
남우조연상허준호
심사위원 특별상플레너스/시네마 서비스
백상예술대상영화부분 대상강우석
청룡영화상감독상강우석
남우조연상정재영
최우수 작품상실미도
제25회 청룡영화상후보: 남우조연상, 각본상, 촬영상, 미술상허준호, 김희재, 김성복, 정은정
제3회 대한민국 영화대상후보: 남우조연상정재영, 허준호

[4]

6. 3. 비판 및 논란

영화에서는 684부대원들이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형수들에서 뽑힌 것처럼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평범한 시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유족들은 강우석 감독 등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으나, 재판부는 무죄 판결을 내렸다.[15][16] 또한, 영화에 《적기가》가 등장하는 것을 두고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며, TV 방영 시에는 해당 부분이 묵음 처리되었다.

한편, 배우 허준호가 연기한 조중사 역의 실제 모델인 김방일 소대장은 영화가 사실적으로 그려졌다고 평가했다.[17]

이 영화의 반향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1월에 사건의 진상 규명을 결정했으며[10], "영화가 국가를 움직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6. 3. 1. 부대원 묘사 논란

영화에서는 684부대원들이 살인, 강간 등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형수들에서 뽑힌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미도 훈련병들의 유족에 따르면, 이들은 높은 보수를 준다는 정보기관원들의 거짓 약속에 속았을 뿐, 평범한 시민들도 실미도 부대에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훈련병 8명의 유족 47명은 강우석 감독과 제작사를 상대로 사자(死者) 명예훼손 및 허위 사실 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15] 실미도 부대원들 중에는 서커스 단원이나 일용직 노동자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재판부는 1심과 항소심 모두 명예훼손이 아니라는 무죄 판결을 내렸다.[16]

6. 3. 2. 적기가 사용 논란

학도의용군동지회 이용수 회장은 영화에 《적기가》가 4차례나 등장한다면서 이것이 "실미도 부대원들에게 살해 명령을 내린 대한민국 정부를 부정하고 반국가단체의 활동을 찬양, 고무하기 위한 의도"라고 주장하며 강우석 감독이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고 고소했다.[15] 결국 지상파 TV방송에 나올 때에는 해당 부분이 묵음처리되어 방송되었다.

7. 역사적 사실과의 차이

영화 《실미도》는 684부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2006년 대한민국 국방부는 공식 보고서를 통해 처음으로 그 존재를 인정했다.[5] 보고서에 따르면 684부대는 대한민국 공군 소속이었으며, 훈련병 31명 중 7명이 훈련 중 사망, 20명이 봉기 과정에서 사망했고, 생존자 4명은 1972년 군사 재판 후 처형되었다.[6]

1971년 8월 23일 발생한 봉기의 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영화에서는 훈련병들이 정부의 처형 결정을 알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영화 제작자 조나단 김은 이 부분의 역사가 불분명함을 인정한다.[6]

684부대의 임무는 김일성 암살이었으나, 관련 문서는 존재하지 않는다.[6] 684부대 경비병 생존자 양동수는 훈련병들이 북파 기회를 얻지 못하고 섬을 떠나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감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증언했다.[6]

영화에서는 탈취한 버스 운전수가 총격전에서 부상당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탈취 당시 운전수는 도망쳤다. 버스 안에서 '적기가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도 실제와 다르다.

부대 창설은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을 받은 KCIA 부장(당시) 김형욱의 지시에 따른 것이며, 공군이 관리 운영을 담당했다. 정식 부대명은 '''공군 2325전대 209파견대'''이며, "684부대"라는 명칭은 부대가 창설된 1968년 4월에서 유래되었다.

7. 1. 684부대원 구성

영화에서 684부대원은 중범죄자나 사형수로 묘사되었지만, 실제로는 고액의 보수를 약속받고 지원한 일반인이 대부분이었다.[10][12] 2005년 12월 대한민국 국방부 조사에 따르면, 684부대는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김일성 암살 및 저택 폭파를 위해 박정희 정권이 만든 부대였다.[11] 31명으로 구성된 부대는 인천 앞바다 실미도에서 훈련을 받았다.

경비병 중 한 명인 양동수는 영화에서 31명의 훈련병들을 사형수로 묘사했지만, 대부분은 길거리 싸움을 자주 하는 종류의 사람들이었다고 진술했다.[6]

영화에서는 거리의 악사 단원, 한약방을 운영하는 집안 출신, 뺑소니 버스 운전수, 가짜 승려, 소매치기, 암흑 상인, 편물 기계공, 노점상, 게이, 권투 선수, 클럽 가수, 요리사, 과수원 작업원, 의사, 점쟁이, 부랑자, 강간범 등이 멤버로 등장한다.

7. 2. 봉기 원인

영화에서는 정부가 훈련병들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처형하기로 결정하고, 이에 훈련병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영화 제작자 조나단 김은 이 시점에서 역사가 불분명하다는 것을 인정한다.[6]

실제 봉기 원인은 불분명하지만, 684부대 경비병 생존자 양동수는 훈련병들이 북파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섬을 떠나지도 못할 것이라는 절망감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증언했다.[6] 그는 훈련병들이 대부분 사소한 범죄자들이었으며, 길거리 싸움을 자주 하는 종류의 사람들이었다고 덧붙였다.[6]

2010년 5월 19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684부대 훈련과 관련된 위험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가혹한 훈련이 기본적인 인권을 침해했다고 판결했다. 또한 2006년까지 훈련병들의 사망 사실을 유족에게 알리지 않아 정신적 고통을 초래했다고 인정하며, 정부에 684부대 유족 21명에게 2.73억을 배상하라고 명령했다.[5]

2005년 12월, 대한민국 국방부 조사 결과에 따르면 684부대는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박정희 정권이 김일성 암살 및 저택 폭파를 위해 편성한 부대였다.[11] 31명으로 구성된 부대는 인천 앞바다 실미도에서 훈련받았으나, 훈련 중 사고로 7명이 사망했다. 남북 공동 성명을 시작으로 남북 화해 분위기 (햇볕 정책)가 조성되자 암살 필요성이 사라져 1971년까지 보복 계획은 철회되었다. 그러나 기밀 유지를 위해 대원들은 실미도를 나가지 못했고, 목적을 잃은 훈련이 중단되지 않아 불만이 커졌다.

1971년 8월 23일, 훈련병 24명은 교육대원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 박정희 대통령에게 열악한 대우 개선을 호소하고자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군과의 총격전 끝에 수류탄으로 자폭하여 20명이 사망했고, 생존자 4명은 군사 재판 후 1972년에 총살되었다.

영화에서는 훈련병들이 중범죄자나 사형수로 묘사되었지만, 실제로는 고액 보수에 이끌려 응모한 일반인이 대다수였다.[10][12] 또한, 정부는 권유 당시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13]

8. 실미도 사건의 사회적 영향

영화 《실미도》는 110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작품이다.[1] 이 영화의 성공은 오랫동안 잊혀졌던 실미도 사건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사건의 진상 규명과 피해자 보상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영화 개봉 후, 실미도 사건과 684 부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대한민국 국방부는 2006년에 이 부대와 봉기에 대한 공식 보고서를 발표하고 처음으로 그 존재를 공식 인정했다.[5]

1971년 8월 23일에 발생한 봉기의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영화에서는 정부가 훈련병들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처형하려 하자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영화 제작자 조나단 김은 이 부분의 역사가 불분명하다는 점을 인정했다.[6]

684부대의 경비병이었던 양동수는 훈련병들이 북한 침투 기회를 얻지 못하고 섬에 갇힐 것이라는 절망감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증언했다. 그는 또한 훈련병들이 대부분 사소한 범죄자들이었으며, 영화에서처럼 사형수가 아니었다고 밝혔다.[6]

2010년 5월 19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정부에 684부대 21명의 유족에게 2.73억을 배상하라고 명령했다.[5] 법원은 훈련의 위험성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가혹한 훈련이 기본적인 인권을 침해했으며, 정부가 오랫동안 사망 사실을 유족에게 알리지 않아 정신적 고통을 초래했다고 판결했다.

영화의 흥행으로 실미도는 관광지로 개발되기도 했다.[1]

8. 1. 진상 규명 노력

이 영화의 개봉으로 684부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졌고, 결국 대한민국 정부는 진상 규명에 나서게 되었다. 특히 더불어민주당 계열의 햇볕 정책 기조와 맞물려 진상 규명 노력이 더욱 탄력을 받았다.

2005년 1월, 대한민국 정부는 영화의 반향을 보고 사건의 진상 규명을 결정했다.[10] 2005년 12월, 대한민국 국방부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684부대는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김일성 암살 및 저택 폭파를 위해 박정희 정권이 조직한 부대였다.[11] 31명의 부대원은 인천 앞바다 실미도에서 훈련을 받았으나, 훈련 중 사고로 7명이 사망했다. 남북 공동 성명 이후 남북 화해 분위기(햇볕 정책)가 조성되면서 암살 계획은 철회되었지만, 기밀 유지를 위해 대원들은 실미도를 떠날 수 없었다. 게다가 목적을 잃은 훈련이 계속되면서 대원들의 불만이 커져갔다.

1971년 8월 23일, 24명의 대원들은 반란을 일으켜 교관들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했다. 이들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열악한 처우 개선을 요구하기 위해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했지만, 대한민국 국군과의 총격전 끝에 수류탄으로 자폭했다. 20명이 사망했고, 생존자 4명은 군사 재판 후 1972년에 총살되었다.

2006년 대한민국 국방부는 공식 보고서를 통해 684부대의 존재를 처음으로 공식 인정했다.[5] 준장 남대연은 684부대가 대한민국 공군 소속이었으며, 7명이 훈련 중 사망, 20명이 봉기 과정에서 사망, 4명이 군사 재판 후 처형되었다고 밝혔다.[6]

1971년 8월 23일 봉기가 발생한 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684부대 생존 경비병 양동수는 훈련병들이 북파 기회를 얻지 못하고 섬에 갇힐 것이라는 절망감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증언했다.[6]

2010년 5월 19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684부대 유족 21명에게 2.73억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5] 법원은 훈련 위험성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가혹한 훈련이 인권을 침해했으며, 정부가 오랫동안 사망 사실을 알리지 않아 정신적 고통을 줬다고 판단했다.

영화에서는 훈련병들이 중범죄자나 사형수로 묘사되었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고액 보수에 이끌려 지원한 '''일반인'''이었다.[10][12] 또한, 정부는 애초에 약속한 보수를 지급할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13]

8. 2. 피해자 보상

2010년 5월 19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684부대 21명의 유족에게 2.73억을 배상하라고 명령했다. 법원은 "실미도 요원들에게 훈련과 관련된 위험 수준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가혹한 훈련이 그들의 기본적인 인권을 침해했다"고 판단했으며, 2006년까지 요원들의 사망 사실을 유족에게 공식적으로 알리지 않아 정부가 초래한 정신적 고통도 인정했다.[5]

8. 3.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

영화 《실미도》는 1·21 사건을 계기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보복하기 위해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지시로 설립된 684 부대의 창설부터 실미도 사건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1] 이 영화는 110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여 대한민국 영화 사상 최초로 1000만 명 이상 관객 수를 기록했다.[1]

《실미도》는 오랫동안 잊혀졌던 실미도 사건을 재조명하여 큰 호평을 받았으며, 실미도 부대와 같은 북파부대를 소재로 한 다른 작품들에도 영향을 주었다.[1] 영화의 흥행은 실미도를 관광지로 개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1]

684부대 교육대장 최재헌 준위 역을 맡은 안성기는 실제 장교 출신으로, 이 점이 배역 선정에 영향을 미쳤다.[1]

참조

[1] 뉴스 A Safecracker Who Stole the Box Office https://www.chosun.c[...] The Chosun Ilbo 2004-01-15
[2] 웹사이트 Silmido https://variety.com/[...] 2004-01-26
[3] 웹사이트 Silmido
[4] 웹사이트 Silmido https://www.cinemasi[...]
[5] 웹사이트 Silmido agents' families get $217,000 https://koreajoongan[...] 2010-05-20
[6] 뉴스 South Korean Movie Unlocks Door on a Once-Secret Past https://www.nytimes.[...] 2004-02-15
[7] 문서 当時。彼の[[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主席|国家主席]]就任は1972年。
[8] 웹사이트 A Safecracker Who Stole the Box Office https://english.chos[...] The Chosun Ilbo 2004-01-15
[9] 문서 2012年現在は[[仁川国際空港]]でバスを乗り継いで行き、観光地化している。
[10] 웹사이트 “歴史から消された” 対北朝鮮特殊部隊 https://www3.nhk.or.[...] 2021-12-16
[11] 문서 なお、現実には684部隊の他に金日成暗殺を目的とした同種の特殊部隊が[[大韓民国陸軍|陸軍]]・[[大韓民国海軍|海軍]]・[[大韓民国海兵隊|海兵隊]]内部にもそれぞれ編成され、特に陸軍の部隊は実際に囚人を集めて編成された部隊とされている。これらの部隊は実尾島事件後、事件の再来を恐れた中央情報部と軍上層部によりいずれも解体された。
[12] 문서 隊員に前科者はいたものの、いずれも[[スリ]]などの軽犯罪者だったとされる。なお部隊の編成に際して、編成を主導した[[大韓民国中央情報部|中央情報部]]は初めは隊員を映画と同じように死刑囚から集めようとし、実際に各地の刑務所を回って集めようとした。しかし、「刑の執行後に遺体を遺族に引き渡さなければならないが、もし特殊部隊(それも684部隊のような北朝鮮潜入を任務とする特殊部隊)の隊員として戦死した場合は遺体を引き渡すことが出来ず、社会問題になりかねない」という[[法務部 (大韓民国)|法務部]]の反対に遭い実行されず、一般人の募集に切り替えたという。
[13] 웹사이트 “歴史から消された” 対北朝鮮特殊部隊 https://www3.nhk.or.[...] 2021-12-16
[14] 문서 2013년 12월 기준. http://www.kobis.or.[...]
[15] 웹 인용 `실미도' 유족들, 강우석 감독 고소 http://www.hani.co.k[...] 2006-07-15
[16] 문서 "영화 '실미도' 명예훼손 아니다" http://www.ytn.co.kr[...]
[17] 뉴스 `실미도` "영화내용 아주 사실에 가깝다" https://news.naver.c[...] 매일경제 2004-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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